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귄터 그라스의 소설을 원작 중 일부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의 배경은 독일에 단치히다. 단치히는 폴란드와 독일 사이의 자유도시로 시작해 두 국가의 분쟁 사이에서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도시다. 영화에는 삼각관계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는데 아그네스, 얀, 알프레드는 각각 단치히 원주민, 폴란드, 독일을 상징한다.
이야기는 3살에 스스로 성장하기를 멈추고 양철북으로 자신의 저항성을 표현하는 오스카의 시점으로 내용을 전달한다.
이야기는 오스카의 이야기로 전개 되기 때문에 다소 믿기 어려운 판타지스러운 면이 있는데 이러한 설정을 통해서 뉴저먼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답게 사회비판, 표현주의의 회귀, 상징이 잘 드러난다.
영화 초반부의 등장인물들의 대사 중
“이제 평화로운 날이 올 수 있을까? 두고 보면 알겠지?”
라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역사를 이미 알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면 안타까운 대사 중 하나이다.
영화에 오스카는 어른들의 사회에서 환멸과 혐오를 느낀다. 그러나 오스카의 저항은 양철북으 두드리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때때로 그러한 소극적 저항은 나치의 행사를 무도회장으로 만들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옷카라는 등장인물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안쓰러운 감정이 많이 들었다. 아이가 부조리한 것을 너무 많이 보고 성장하는 모습, 엄마를 잃고 할머니의 치마속에 숨어들어가는 모습에서 연약한 존재에 대한 연민이 느껴졌다.
처음 보았던 아바타1에서는 3D와 영상미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소재도 신선했지만 결국 역대 1위의 흥행성적을 만들어 준 것은 역시나 영상미 였다. 이번에도 그런 점에서 스토리 보다는 영상미 적으로는 충분한 합격점을 줄 수 있다. 다른 몇몇 사람들에게 스토리가 너무 빈약하고 쓸데 없이 길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아름다운 영상에 충분한 스토리 였고,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다만 역시나 후편을 위해 완결성을 고의로 열어 두었던 점이 아쉽다.
이야기의 주제는 가족의 사랑이 메인으로 보인다. 사람하는 사람과 아이를 낳고, 입양하며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어간다. 그리고 가족의 사랑을 위한 선택이 때로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가족과 행복한 생활을 하던 주인공이 결국 가족을 잃고 지키려하는 온전히 가족을 지키려 하는 부분까지가 이 영화의 주에와 연결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족을 위한 것이가? 무조건적인 보호가 가족을 위한 것이가? 극중 주인공은 부족을 버리고 가족과 숨는 선택을 한다. 그에게는 가족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부족들 사이에서 생활하던 아이들은 각자의 이유로 힘들어 하고 고향을 그리워 했다. 또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도록 하기 위해 엄격한 모습을 보이지만 이는 자녀들에게 오해를 사기도 했다. 과연 내가 사랑하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성숙한 것인지 고민해 보게 된다.
사람의 심경을 바꾸는 가장 큰 동력은 분노 일지도 모른다. 인간들과의 싸움을 피하던 나비족도 결국 자매와 같던 툴군의 죽음, 가족의 죽음으로 행동을 시작한다. 이는 비단 주인공 일행 뿐만 아니었다. 극중 악역 역시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 인질을 풀어주는 모습을 보여주며 기존과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인다. 특히 이 장면은 보통 아이를 가지고 협박하는 악역의 역할을 누구나 할 수 있으며, 반대로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는 선역의 역할도 누구나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영화를 보며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는 툴쿤족의 방식이다.툴쿤족의 방식은 어떤가? 그 어떤 폭력도 정당화 수 없다는 원칙이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는 과 무협지의 명대사에 따라 내가 당해도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나와 맞지 않다. 아들에는 아들. 오히려 똑같이 되갚아 준다는 파야칸이 맞지 않나? 내게 소중한 사람이 죽어 나가도 폭력을 거둬야 하는가? 되 갚는가는 말은 못하더라고 적어도 나와 내가족의 위험에는 대응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러니타임 세 시간은 조금 길것 같아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때문에 미리 화장실을 다녀오고 영화를 보는 내내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3시간이 지겹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시계 한 번 보지 않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즐겁게 보았다. 특히 아름다운 영상미를 관찰하는 것 만으로도 눈을 떼지 못했다. 특히 3D를 추천한다. 생동감 넘치고 선명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1편의 숲과 다른 바다의 신비로움이 잘 드러나는 듯이 보였다.
영화를 보면 미국과 과학 문명이 가진 폭력성을 드러내는 장면이 많다. 전체적으로 미국이 인디언 부족을 몰아내고 공격한 방식이 나비족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났다. 또한 고래를 포획하는 일본과 같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생명을 경외시하는 부분에서도 인류의 폭력성, 환경이나 생태계 보다는 돈을 더 중요시 하는 모습까지 미국사회, 더 나아가 인간 사회에 대한 비판이 보였다.
이 외에 영화에 관해 든 생각이라면 심해가 생생하고 툴쿤이 처음 등장하는 씬이 약간의 심해 공포물 같은 느낌이 있어 무서웠다.
또 개인적으로 스파이디가 나중에 배신자가 되거나 인간과 원주민이 공동으로 행성에 정착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초대 공동 대표로 활동할 것 같은 느낌이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를 정말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다. 특히 '뿌와왕' 하며 웅장한 사운드와 함께 전개 되던 영화 장면을 굉장히 몰입하며 보았던 기억이 있다. 때문에 알레한드로(베니시오 델 토로)가 다시 나오는 것 만으로도 1편을 보았던 사람들은 기대감을 가지고 보았을 것이다.
이번에도 긴장검 넘치는 OST는 여전했다. 그러나 내용 전개 면에서는 전작에 비해 자소 아쉬운 마음이 느껴졌다. 일단 박진감이 조금 떨어졌다. 쉴새업이 몰아치던 전작에 비해 이번 작품은 서사를 더 많이 담고 액션 사이에 여운을 넣은 느낌이다. 또 가장 하귀운 점은 마치 이번 작품이 3편으로 가기위한 중간 단계처럼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하나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완결성을 중요시 생각하기 때문에 데이오브 솔다도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3편이 나온다며 주저 없이 볼 예정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긴장감과 액션, 음악과의 조화는 다른 영화에서 만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또한 미국이 말하는 정의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영화인 점도 마음에 든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장면안 아기 엄마가 카르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듯한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마약, 밀입국이 미국에서는 생각보다 더 일상에 깊숙히 침투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 졌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때의 감동이 나시 올라와서 무의식적으로 눈물을 흘린것 같다. 감정이 복받쳐 올라온 것은 아니다. 다만 그때의 감동을 몸과 무의식이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슬램덩크를 보기 전에 먼저 많은 리뷰와 예고편을 봤다. 나도 슬램덩크의 팬 중 하나로서 그들이 하는 감동에 대부분 공감 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사실 산왕전과의 시합 결과가 무의미하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결말을 이미 알고 있다. 웹툰이나 소설 기반으로 많은 영화가 만들어 졌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 만큼 결말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작품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볼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감동의 결이 조금 다르다. 일단 시점이 송태섭으로 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 애정을 많이 가진 캐릭터가 아니다 보니 송태섭이라는 인물 그 자체에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다. 송태섭의 서사는 그가 어렸을적 형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와 그의 가족들이 건강하게 성장해 나감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도 감동이 있다. 때문에 이노우에가 말한 다른 시점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그리고 산왕전이 송태섭에게 가진 의미 역시 잘 완성한 느낌이다.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사람은 아니지만 애니메이션 작화에 대해서 조금 언급하자면, 농구 동작들의 스피디한 전개, 역동적인 장면은 실제 움직임과 굉장히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히려 가볍게 걷거나 가만히 서있는 장면에서 동작의 어색함이 느껴졌다. 너무 3D그래픽, 로봇과 같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슬램덩크 마지막 산왕전 종료 직전의 대사 없는부분이 잘 표현되었다. 신기하게도 영화관 전체에 정적이 흐른 느낌. 다시 봐도 멋진 장면으로 기억된다. 서사는 송태섭이 중심이지만 각자의 감동은 오롯이 가져도 무방해 보인다.
해당 작품은 작품성뿐만 아니라 작가에 관한 재밌는 일화가 있다. 로맹 가리의 작품이 점점 평단에서 낮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결국 로맹 가리는 평단에서 더 이상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아마 이후에는 어떤 작품을 내더라도 모두가 혹평을 했을 것이다.
이에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친척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한다. 이 작품은 결국 평단에 극찬을 받았으며, 에밀 아자르는 일생에 단 한번만 받을 수 있다는(이전에 로맹 가리는 이 상을 받았다.) 문학상을 수상한다. 이후 몇몇 사람들이 ‘자기 앞의 생’이 로맹 가리의 작품일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로맹 가리는 이제 이런 작품을 쓸 수 없는 한물 간 작가라며 의혹을 일축했다.
로맹 가리가 비평가들을 비웃으려 했는지, 혹은 로맹 가리라는 이름 안에서는 글을 더 이상 쓸 수 없었는지는 모르겠다. 난 에밀 아자르의 작품을 처음 읽으며 로맹 가리라는 이름보다는 에밀 아자르가 더 익숙해 앞으로는 에밀 아자르로 사용하겠다.
이 작품의 화자는 모모이다. 모모는 삶 속에 있는 다양한 사람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모가 말하는 사랑은 어쩌면 우리의 표현으로 ‘정(情)’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로자 아주머니 앞으로 자신의 친모가 돈을 송금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모모가 울음을 터트린 것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돈이 아니라 사랑임을 말해주는 울음이었다.
모모는 말한다. 로자 아줌마와 모모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실제 로자 아주머니는 송금이 끊어 졌음에도 모모를 내치지 않는다.
모모는 또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 ‘쉬페르’를 통해서 이러한 모모의 가치관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강아지 쉬페르를 돈과 바꾸었지만 돈을 버려버리는 모모의 모습을 보며, 자신은 돈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강아지를 보냈음을 말한다. 어쩌면 돈과 사랑의 가치를 계속해서 비교해서 보여주는 이러한 장면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로자 아주머니의 몸이 점점 안 좋아 지며 많은 이웃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이들은 아가페적 사랑, 열정이 넘치는 사랑이 아니라 그저 이웃으로 함께 부대껴 사는 사람으로 사랑을 베푼다. 우리의 삶 속에는 많은 사랑이 있으며 그 깊이를 가늠하지 않아도 되고 각자의 사랑이 있음을 말하는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사랑 속에 살고 있다고.
애절한 남녀주인공의 사랑이 아니라 삶 속에 만나는 모든 사람과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고, 그것이 자기 앞의 생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생명이란 것을 무엇으로 정의 할 수 있을까?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가 끊임없이 고민한다. 이 문제의 결말은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생물이 있다. 신경세포 지도인 커넥튬과 DNA지도가 모두 밝혀진 최초의 다세포 생물이라고 한다. 어떤 연구 팀에서 ‘예쁜꼬마선충’의 유런 연결정보, 연결 강도를 구현한 로봇을 만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별다른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입력하지 않았음에도 해당 로봇은 ‘예쁜꼬마선충’의 행동 패턴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영혼이 없는 생명체의 탄생이다.
또한 얼마 전,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고 번식까지 가능한 인공생명체를 미국에서 만들었다는 뉴스기사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인공생명의 탄생 되었다.
다이브의 배경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디스토피아다. 발전한 미래 기술 덕분에 살아있을 적의 기억을 가진 로봇이 존재 한다. 이 로봇은 인간일까?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이브의 내용 중 인상 깊었던 것은 스스로의 생을 택하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었다. 치료를 거부하는 사람이나 로봇으로 다시 태어나서 자살하는 로봇까지.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를 존귀하게 만들고 자신이 영혼이 있는 인간임을 보여주는 것은 어떻게 사는가보다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인지가 더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학적 원리 -> 간단한 활용 -> 생명과학 뉴런의 입장 -> 사회학, 심리학적 입장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마지막에 유튜브 영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영상으로 보실 분들은 유튜브로 가서 보세요.
주요단어: 수학, 로그, 활용, 베버, 페히너, 법칙, 감각, 자극, 진동, 비율, 상수
로그의 발전은 큰 수의 계산을 하기 위한 방안으로 처음 발생 했다.
별의 거리를 계산하는 것과 같이 큰수의 계산을 하는데 있어 로그의 활용은 절대적이였으며
큰 수를 절대적인 양으로 계산 하는 것은 오히려 인지적인 부조화를 안겨 주었다.
로그는 필요에 의해서 생겨 났으나 신기하게도 우리의 인지(생명과학 또는 심리학, 사회학)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먼저 베버 - 페히너의 법칙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① 베버-페히너 법칙(Weber-Fechner law)
: 감각기가 자극 받은 정도의 변화를 느끼려면, 처음 자극 대비 일정 비율 이상의 자극을 받아야 된다.
위 법칙은 수학적 공리에서 출발한 증명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해당 내용의 전개가 수학의 로그의 역할, 생명과학에서 자극의 수용과 역치, 심리학, 사회적 변화를 잘 설명해주는 모델이다.
때문에 몇몇 수학 가설이 증명을 못하였지만 다양한 과학 분야에서 사용하 듯이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 간단하게 살펴본다.
② 베버 상수와 베버의 법칙
동일한 무게의 구슬이 여러개 있다고 가정하자.
처음 9개의 구슬을 손에 든 무게 감각이 있을 때, 10개, 11개로 구슬의 수를 변화 했을 때, 무게감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다, 12개가 되는 순간 무게의 변화를 느꼈다고 하자.
이 때, 처음 무게를 I, 무게 변화를 느낀 나중 무게를 I'라 하면,
이 때, 베버 상수를 k라 하면 베버 상수 k는
따라서 베버 상수를 이용하여 감각(자극의 수용정도)량을 S라 하면,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정도는 위와 같이 나타 낼수 있고, 이를 베버의 법칙이라고 한다.
실제 이 k의 값이 오감에서 작은 값을 가지면 그만큼 예민한 변화를 잘 느낀다고 생각할 수 있다.
k의 값이 큰 사람들은 자극의 변화를 느끼기 위해서 큰 변화량이 필요하고 우리는 둔감하다라고 표현한다.
③ 베버 페히너의 법칙
이후로는 간단하다. 위의 식을 적분하면,
실제 감각량의 정도 S가 I에 비려하는 것이 아니라 log I로 나타나는 로그함수의 꼴임을 알 수 있다.
④ 베버 페히너 법칙의 활용
실제 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이 법칙을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아이스크림 1+1을 하는 경우 5000원에 이득이 있다면 10분 거리의 다른 마트를 가기도 하나,
100만원짜리 노트북을 사는 경우 5000원의 두배인 10000원 할인해 주는 10분 거리의 매장이 있을 경우 굳이 이동하지 않는다.
가장 전통적이고 대표적인 것은 음악이다.
'라'음이 440Hz의 진동수를 가지고 1옥타브 위의 진동수가 880Hz라 합시다. 그러면 다음 옥타브의 진동수는 1320Hz가 아니다. 1760Hz가 됩니다.
진동수가 정확하게 2배가 됩니다.
조명의 밝기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방에 똑같은 전구 2개를 켜 놓았다고 할 때, 새로운 전구 1개를 추가하면, 방의 밝기 차이는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10개의 전구가 동일한 방에 켜져 있다면, 전구를 추가 한다고 해서 그 밝기 차이가 눈에 띄지는 않을 것입니다.
⑤ 생명과학 속 베버 페히너 법칙
우리 몸에는 수 많은 감각 기관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뉴런이다.
뉴런은 역치 이상의 자극이 들어 왔을 때, 이를 전달한다.
아래의 예는 설명을 위해 임의로 만들어 놓은 예제 입니다.
만약 정사각형 모양의 25개의 역치 2인 뉴런이 감각을 수용해서 전달하고 있다고 합시다.
이 때, 3행 4열에 위치를 중심으로 5만큼의 자극이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5/25=0.2 이므로 대부분의 뉴런은 자극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21개의 뉴런에는 0의 자극이, 3개의 뉴런에는 1의 자극, 1개의 뉴런에는 2의 자극이 들어 왔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럼 실제 감각을 느끼는 값은 2의 자극이 들어온 하나의 뉴런이면 이를 감각량 S=1이라고 합니다.
로그로 표현하면 자극을 I=5 라 하면 아래와 같은 로그 식이 성립합니다.
라고 하면
이 성립합니다.
이제 같은 위치를 중심으로 25의 자극이 들어 왔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극만으로 비교하면 5배의 자극이 들어온 것이죠.
그렇다면 자극을 느낀 감각량도 다섯배가 될까요?
25/25 = 1 이므로, 각 뉴런은 평균적으로 1의 자극을 받을 것입니나.
위와 마찬가지로 1의 자극을 받은 뉴런이 21개, 평균 1을 중심으로 2만큼의 자극, 0만큼의 자극을 받은 뉴런들이 2개 씩 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위의 그림을 보면 역치 값2를 넘긴 자극은 2개 입니다. 우리는 2만큼의 감각을 느낄 것입니다.
위에 로그 식에 대입해 보면
가 성립할 것입니다.
⑥ 사회학, 심리학 속 수학(베버 페히너 법칙)
어떤 사회문제 A가 발생 했을 때, 어떤 사람은 해당 문제를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고 수용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또 다른 사람은 무신경 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해당 문제 A를 부정적으로 바라 볼 것이다.
또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 또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그 정도가 다들 것이다. 이때 해당 문제를 위의 생명과학의 예제의 자극이라 생각하고 역치를 해당 문제로 인해 실제적인 이익 또는 손해를 보고 행동하는 사람의 수라고 생각해 보면 이 관계로 베버 페히너의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로그의 밑이나 베버 상수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에 대한 통계적인 문제 대한 고민은 필요할 것이다.
우리의 인지 감각은 아득히 큰 수, 값에 대해서 뭉뚱그려서 생각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어떤 원주민 부족은 1,2,3 이후는 크다 또는 많다로만 측정하는 부족이 있다고도 합니다.
우리의 인지구조는 이러한 큰 값을 막연하게 인지하여 뇌의 효율을 높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10cm과 100cm를 인지하는 값의 차이만큰 10조km와 100조km의 차이를 명확하게 인지한다면 뇌는 큰 값을 처리하며 낮은 효율, 혹은 인지적 과부하가 올지도 모릅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차이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족한 것을 정확한 정도를 측정하려 죄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는 일상 생활속에서도 많이 보입니다. 사람들은 실제 자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작은 일이라도 크게 받아들이며, 자신과의 상대적 거리가 멀고 관계가 없는 일은 아무리 무섭고 큰일 이더라고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위 그래프는 y=log x로그함수의 그래프 입니다.
x가 실제 사건과 본인의 관계거리, y가 해당 문제에 대한 감각량이라 하면
x가 가까워 본인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면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파악하지만 본인과의 거리가 멀면 실제로는 엄청 큰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또 다르게 생각하면 x가 물건의 가격, y가 행동이 변할 확률이라면, 8000원 짜리 음식을 6000원에 2000원 더 싸게 먹을수 있다면, 기꺼이 식당을 옮기지만 170000원 짜리 코스요리가 165000원 으로 제공하는 식당이 있어 5000원을 더 싸게 먹을수 있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동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생명과학, 사회학, 심히학 속에서 베버-페히너의 법칙은 다양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