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작품은 작품성뿐만 아니라 작가에 관한 재밌는 일화가 있다. 로맹 가리의 작품이 점점 평단에서 낮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결국 로맹 가리는 평단에서 더 이상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아마 이후에는 어떤 작품을 내더라도 모두가 혹평을 했을 것이다.

 

이에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친척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한다. 이 작품은 결국 평단에 극찬을 받았으며, 에밀 아자르는 일생에 단 한번만 받을 수 있다는(이전에 로맹 가리는 이 상을 받았다.) 문학상을 수상한다. 이후 몇몇 사람들이 자기 앞의 생이 로맹 가리의 작품일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로맹 가리는 이제 이런 작품을 쓸 수 없는 한물 간 작가라며 의혹을 일축했다.

 

로맹 가리가 비평가들을 비웃으려 했는지, 혹은 로맹 가리라는 이름 안에서는 글을 더 이상 쓸 수 없었는지는 모르겠다. 난 에밀 아자르의 작품을 처음 읽으며 로맹 가리라는 이름보다는 에밀 아자르가 더 익숙해 앞으로는 에밀 아자르로 사용하겠다.

 

이 작품의 화자는 모모이다. 모모는 삶 속에 있는 다양한 사람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모가 말하는 사랑은 어쩌면 우리의 표현으로 ()’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로자 아주머니 앞으로 자신의 친모가 돈을 송금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모모가 울음을 터트린 것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돈이 아니라 사랑임을 말해주는 울음이었다.

 

모모는 말한다. 로자 아줌마와 모모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실제 로자 아주머니는 송금이 끊어 졌음에도 모모를 내치지 않는다.

 

모모는 또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 쉬페르를 통해서 이러한 모모의 가치관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강아지 쉬페르를 돈과 바꾸었지만 돈을 버려버리는 모모의 모습을 보며, 자신은 돈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강아지를 보냈음을 말한다. 어쩌면 돈과 사랑의 가치를 계속해서 비교해서 보여주는 이러한 장면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로자 아주머니의 몸이 점점 안 좋아 지며 많은 이웃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이들은 아가페적 사랑, 열정이 넘치는 사랑이 아니라 그저 이웃으로 함께 부대껴 사는 사람으로 사랑을 베푼다. 우리의 삶 속에는 많은 사랑이 있으며 그 깊이를 가늠하지 않아도 되고 각자의 사랑이 있음을 말하는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사랑 속에 살고 있다고.

 

애절한 남녀주인공의 사랑이 아니라 삶 속에 만나는 모든 사람과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고, 그것이 자기 앞의 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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